패션 브랜드 ‘엑스까라’를 런칭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 주세요.
- 엑스까라의 시그니처 로고는 1992년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부를 때 ‘말콤 X’의 X를 상징하는 X 로고를 옷에 붙여서 입고 무대를 했었어요. 제가 그 옷을 입기 시작하고 전국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요. 당시 대중들은 제가 X세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라며 엄청난 사랑을 주었었지요. 그 당시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메가 히트를 기록하면서 많은 대중들은 X 마크를 보면 저를 떠올리게 되었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X 마크를 보면 저를 떠올리는 현상이 일어난 거예요.
그러던 와중 우연히 팬클럽에 있던 오랜 팬분이 의류 관련 사업을 하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 팬분이 팬미팅 때 저에 관련된 X 로고나 프로젝트 이름 IWBH을 프린팅 해서 입고 온 거예요. 옷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았는데 판매하는 게 아니고 너무 좋아서 본인이 만들어서 입고 다닌다는 말에 저도 마침 굿즈를 생각하고 있던 시점에 그 옷을 보게 되어서 저의 스토리를 자세히 알고 있는 팬과 함께 하면 좋은 디자인이 나올 것 것 같아서 제안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그분도 영광이라며 함께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의류 디자이너 중 한 분이 MZ세대이다 보니 저의 히스토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세대였던 거예요. 그 팬분이 디자이너에게 저에 대한 스토리를 계속 설명하며 옷을 만들다 보니 X세대와 MZ세대의 공통점을 찾아가며 그들이 소통할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 목표가 생겼어요. 패션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MZ와 X세대가 서로 토론하고 소통하며 공통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세대 간 간격이 크지만 문화적으로 많은 것들을 공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소통은 문화의 갭을 무너트릴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는 단순히 옷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옷을 만드는 스토리텔링이 다 스며들게 디자인하며 MZ세대, X세대 둘 다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신제품 출시가 조금씩 늦어지고 있답니다.
엑스까라의 시그니처 마크는 당시에 제가 한국에서 유행시켰던 것들을 오마주 한 거예요. 옷을 만드는 과정에서 제가 MZ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MZ세대가 현진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
평소에 즐겨 입는 스타일을 소개해 주세요.
- 특별한 공연을 할 때는 수트를 입구요, 평소에는 스트릿 브랜드 스타일을 주로 입습니다. 기본적인 맨투맨, 후디, 티를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입었었던 힙합바지의 트렌드가 다시 오고 있어서 1992년에 입었던 힙합바지를 제작하고 있고 저도 다시 입을 예정입니다.
- 저는 시나리오를 먼저 쓰기 시작합니다. 시나리오 안에서 가사에 꼭 들어갔으면 하는 문장을 적어가며 체크를 합니다. 그 내용을 토대로 경험을 했던 부분인지 안 한 부분인지 구분을 하고 경험하지 못했던 부분을 직접 체험하러 갑니다.
노래, 연주, 작곡하는 과정에서 경험을 하고 진행하는 것과 경험 없이 하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특히 노래를 부르는 부분에 있어서는 수준 차이가 심하게 납니다.
‘소리쳐봐’를 예를 들면 ‘혼자보다 둘이, 둘보다 셋이, 셋보다 넷이 힘을 합치면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고 나는 세상을 향해 크게 소리칠 수 있다’라는 내용이에요. 저는 어릴 때부터 솔로로 활동하긴 했지만 주변 스태프들이 항상 함께 했었고 저 혼자 독립적으로 무얼 해본 경험이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철저하게 혼자 있어봐야 하는 경험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차도 없이 돈도 없이 6개월 동안을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그 경험으로 인해 사람들 도움을 받으면 이러한 감정이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시나리오로 녹여냈습니다.
‘무념무상’이라는 노래는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이 일부 몰상식한 권력층에게 울부짖고 항의하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무작정 서울역에 가서 11월에서 12월까지 한 달 동안 노숙자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이 언제 기뻐하고, 슬퍼하고, 무엇이 필요하고 세상에 어떠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계속 인터뷰를 했었어요. 그렇게 완성된 곡이 무념무상이에요. 이렇게 경험을 하고 나서 편곡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 감성을 반영하여 편곡을 해야 느낌을 가지고 표현할 수 있거든요.
편곡한 반주 위에서 가이드를 하면서 멜로디를 붙이고 제가 경험한 것들 중 핵심적인 문장들을 추려냅니다. 그리고 편곡한 곡, 가이드 멜로디, 시나리오(가사에 녹여냈으면 하는 문장들)를 홍지유 작사가님께 보냅니다.
중요한 점은 시나리오에 적은 문장들이 앞뒤로 내용이 연결될 수 있게 만들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가이드의 발음을 살려서 단어를 찾아서 넣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렇게 까다로운 작업과정이 있기에 한국에서 제 곡을 작사해 주는 작사가는 홍지유씨 밖에 없습니다. 작업과정이 너무 고난도이고 작사만 한 달 이상 걸리기에 다른 작사가 분들은 중도에 포기를 하시더라고요.
가사가 완성되면 가이드 녹음을 먼저 하고 이후 계속 연습을 하여 녹음실에 가서 최종 녹음을 합니다.
곡 작업과정이 다른 작곡가들과 완전히 다른 것 같습니다.
- 제 노래만 이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이 노래의 스토리를 경험한 사람이어야지만 진심으로 감성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곡들은 상상해서 작업하기도 합니다. 현진영 프로젝트로 나오는 OST에 제자들이 부르는 곡들이 있는데 제가 경험하지 않은 것들도 상상해서 만들기도 합니다.
제가 직접 부르는 장르는 재즈힙합이기 때문에 자기 인생이 기본적으로 녹아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 자신을 모르면 재즈를 한다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경험한 것을 모르면 그 노래를 부를 수 없어요.
작곡하신 노래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 한 곡만 뽑는다면 ‘소리쳐봐’입니다. 곡을 만드는 과정도 길었고 고생을 많이 했어요. 장장 6개월 동안 돈 한 푼 없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다닌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경기도, 춘천, 대전 등 타지들 돌아다니며 교회에서도 자고, 친구 집에서도 자고 고생하며 지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도움받는 경험을 제대로 하게 되었어요. 사실 ‘소리쳐봐’가 나오기 전에는 음악 작업과정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을 일부러 찾아다니지는 않았지만 ‘소리쳐봐’를 작곡할 때부터 스스로 능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게 되었어요.
작곡하신 곡 중 ‘요람’을 만드신 과정이 궁금합니다.
- 구치소 안에서 만들었어요. 구치소에서 겨울밤에 마룻바닥에서 찬 냉기가 올라오는데 코가 시리고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추운 공간에서 ‘이 현실이 엄마 품에서, 아빠 보호 아래서 잠이 들던 요람이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만든 곡이에요.
대한민국 1세대 재즈 피아니스트셨던 아버님께서는 어떠한 음악적인 영향을 주셨나요?
- 아버지는 우리나라 최초 미 8군 재즈 빅밴드 ‘트리플A’를 만드신 분이예요.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음악이론을 가르쳐 주지 않으셨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카세트테이프가 여러 개 들어가 있는 박스를 발견했는데 박스 앞에 ‘현석이 스케일 학습 테이프’라고 적혀있어서 열어보니 코드 C에서 B까지 테이프마다 전부 적혀 있었던 거예요.
생각해 보니 어렸을 때 피아노 학원에 다녀오면 아버지께서 E 코를 찍어주고 마음대로 연주해 보라고 하셨을 때 제가 연주한 부분에 대해 만족하시면 그날은 밖에 나가서 놀고 오라고 용돈도 쥐어주셨어요. 그런데 제가 연주한 부분이 만족스럽지 못하시면 밖에도 못 나가고 하루 종일 재즈음악을 틀어놓으셨는데 어릴 때는 ‘본인이 듣기 위해 틀어놓으시는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저에게 스케일을 듣게끔 해서 학습을 시키셨던 거예요. 제가 D로 시작하는 연주를 못하면 D로 시작하는 음악을 하루 종일 듣게 하셨었어요. 귀로 듣고 제가 익히게 하셨던 거예요. 스케일 공부는 듣는 방법밖에 없거든요. 아버지는 일상생활 안에서 저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같아요.
하루는 군인들 위문공연 가기 전날에 본인은 군인들이 언제 슬퍼하고 눈물 흘리는지 모르니 체험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셔서 집 앞에 눈 쌓인 마당에서 이불을 펴고 주무신 일화가 있었어요. 그때는 ‘아버지는 정말 음악에 미친 사람이다’라고 생각을 했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제가 뮤지션의 길을 걷고 아버지가 하셨던 행동을 하게 되니 왜 그렇게 행동하셨는지 이제는 이해가 됩니다.

앞으로 도전해 보고 싶은 장르가 있다면?
- 사실 그동안 많은 장르들을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국악인 이희문씨와 함께 국악과 재즈를 콜라보레이션 해보는 것이 희망입니다.
탄탄한 보컬 실력을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 특별한 목 관리는 하지 않고 있지만 호흡과 발성을 매일 10분 이상씩 하고 있습니다. 호흡, 발성이 안 잡힌 상황에서 계속 노래를 하게 되면 오히려 목이 망가집니다. 호흡, 발성은 톱니바퀴처럼 붙어있어서 한 가지라도 멈추면 안 됩니다. 저는 1988년도 SM 연습생 시절 이수만 선생님의 커리큘럼에 성악을 기본으로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호흡, 발성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도 매일 호흡, 발성을 했었어요. 길게는 한 시간 짧게는 10분씩 지금까지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어요. 이것이 저만의 보컬을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바람기억’ 라이브 무대를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 저는 기본적으로 가수라면 이 정도 수준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에는 기본이 안된 가수가 너무 많다 보니 제가 상대적으로 더 잘해 보이는 것뿐이에요. 90년대에 저희 선배님들을 생각해 보면 저보다 훨씬 노래를 잘하는 분들이 많았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노래를 못하는 가수들이 많이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제가 더 잘해 보이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데뷔하기 전 SM 연습생 시절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세요.
- 재밌는 일화가 많이 있었습니다. 데뷔 초에 이수만 선생님이 구해오신 일본 유명 디자이너가 만든‘야한 여자’의 무대의상을 세탁하기 위해 집에 가지고 가다가 지하철에서 졸다가 놓고 내린 일이 있었어요. 당시에 100만원이 넘는 옷이었는데 결국 똑같이 카피해서 만들어서 입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리고 안무가 유출되면 안 되는 상황이라 지하 연습실에 갇혀서 연습했던 기억도 있고요. 데뷔 전에 문나이트 라는 춤추는 클럽에서 흑인들과 놀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Feel을 배웠던 기억이 있어요. 당시에는 많이 신나고 즐거웠었어요.
요즘 아이돌 제작자들의 포인트는 군무, 칼각이 기본이지만 당시 이수만 선생님의 가르침은 그루브와 Feel을 중요시 생각하셨었어요. 이런 기본기들이 나중에 저의 안무에 영향을 많이 주었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음악 활동을 멈추지 않고 지속하는 비결을 말씀해 주세요.
- 제가 할 수 있는 게 음악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이것보다 제가 더 돈을 잘 벌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실은 작곡가로써 한 곡을 써도 일반 직장인보다 많이 벌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아요. 가수를 계속할 수 있었던 계기는 제가 작곡가였기 때문에 직접 곡을 쓰고 제 작업실에서 녹음하면 되니까 가능했습니다. 저는 음악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절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음악 이외에는 할 것이 없다고 자기를 세뇌해야 했었어요. 그리고 음악으로 나도 즐겁고 가족들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지 생각을 했을 때 자신이 있다면 끈을 놓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뮤지션으로서 슬럼프가 있으셨나요? 극복하신 비결을 말씀해 주세요.
- 저는 데뷔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슬럼프예요.
계속되는 슬럼프 안에서 한 가지 목표를 이루었을 때 잠깐 슬럼프를 벗어나는 것 같아요. 끊임없이 노력하는 기간은 그 뮤지션에게 슬럼프나 마찬가지인 거죠. 계속된 시행착오를 겪으며 안됐던 부분을 성공하면서 무대 위에서 박수를 받을 때 잠시 벗어났다가 내려오면 다시 슬럼프라 시작되는 것 같아요. 음악은 만족하는 순간 끝난다고 생각해요. 내 노래, 내 작품, 내 플레이에 만족하는 순간 죽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 대한 채찍질이나 무대 위 연주를 후회하는 분들이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인기를 많이 얻으면 교만하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대중들 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분들이 많죠. 저도 그 중 하나였고요.
제가 잘 되었을 때 교만했기 때문에 모든 걸 잃어버리고 바닥을 치고 다시 회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었죠. 그런데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소리쳐봐’도 안 나왔을 거고 재즈 힙합도 하지 않았겠죠.
휴식이 필요할 때는 어떻게 힐링하시나요?
- 저는 주로 콘솔게임(플레이스테이션)을 하고 반려견들과 산책을 합니다. 쉬는 날은 아내와 함께 애견카페에 자주 갑니다.
음악에 대한 확신이 있으셨나요?
- 저는 음악으로 잘 될 자신이 있었어요. 포기하지 않는다면 음악을 계속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궁극적인 목표는 재즈였고 재즈는 대중적인 인기와는 관계없으니까요. 꾸준히 노력했더니 재즈 페스티벌에 초청될 정도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실패와 포기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길을 끝까지 가봐야 결과를 알 수 있는데, 중도에 포기해 버린다면 결과를 확인할 수 없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사람만이 성공을 확인할 수 있는 거예요. 저는 결말을 봤다는 것 자체가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포기를 너무 쉽게 하는 모습을 볼 때 안타까워요. 제자들에게 ‘포기하지 않고 결말을 보는 게 인생에 대한 성공이다.’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어요.
뮤지션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팬이 있다면?
- 예전에 백혈병을 앓고 있던 여성 팬이 있었는데 우리 딸이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다가도 TV에 현진영 씨가 나오면 웃는다고 병원에 와서 사인을 해줄 수 있는지 아버지께서 직접 편지를 써주셔서 방문하기로 했었어요. 그런데 스케줄이 계속 나지 않아서 미루고 미루게 되었는데.. 결국 그 팬이 하늘나라로 떠난 일이 있었어요.. 그 때 못 간 부분에 대해 후회를 많이 하고 있어요. 지금도 가슴에 짐처럼 남아있어서 생각이 계속 납니다.
가수를 꿈꾸는 분들에게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위 인터뷰 내용에서 저의 조언이 도움이 된다면 주저하지 말고 직진하세요. 그러나 음악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떠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요. 음악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어렵고 고된 길이니까요.
패션 브랜드 ‘엑스까라’를 런칭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 주세요.
- 엑스까라의 시그니처 로고는 1992년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부를 때 ‘말콤 X’의 X를 상징하는 X 로고를 옷에 붙여서 입고 무대를 했었어요. 제가 그 옷을 입기 시작하고 전국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요. 당시 대중들은 제가 X세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라며 엄청난 사랑을 주었었지요. 그 당시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메가 히트를 기록하면서 많은 대중들은 X 마크를 보면 저를 떠올리게 되었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X 마크를 보면 저를 떠올리는 현상이 일어난 거예요.
그러던 와중 우연히 팬클럽에 있던 오랜 팬분이 의류 관련 사업을 하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 팬분이 팬미팅 때 저에 관련된 X 로고나 프로젝트 이름 IWBH을 프린팅 해서 입고 온 거예요. 옷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았는데 판매하는 게 아니고 너무 좋아서 본인이 만들어서 입고 다닌다는 말에 저도 마침 굿즈를 생각하고 있던 시점에 그 옷을 보게 되어서 저의 스토리를 자세히 알고 있는 팬과 함께 하면 좋은 디자인이 나올 것 것 같아서 제안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그분도 영광이라며 함께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의류 디자이너 중 한 분이 MZ세대이다 보니 저의 히스토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세대였던 거예요. 그 팬분이 디자이너에게 저에 대한 스토리를 계속 설명하며 옷을 만들다 보니 X세대와 MZ세대의 공통점을 찾아가며 그들이 소통할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 목표가 생겼어요. 패션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MZ와 X세대가 서로 토론하고 소통하며 공통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세대 간 간격이 크지만 문화적으로 많은 것들을 공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소통은 문화의 갭을 무너트릴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는 단순히 옷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옷을 만드는 스토리텔링이 다 스며들게 디자인하며 MZ세대, X세대 둘 다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신제품 출시가 조금씩 늦어지고 있답니다.
엑스까라의 시그니처 마크는 당시에 제가 한국에서 유행시켰던 것들을 오마주 한 거예요. 옷을 만드는 과정에서 제가 MZ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MZ세대가 현진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
평소에 즐겨 입는 스타일을 소개해 주세요.
- 특별한 공연을 할 때는 수트를 입구요, 평소에는 스트릿 브랜드 스타일을 주로 입습니다. 기본적인 맨투맨, 후디, 티를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입었었던 힙합바지의 트렌드가 다시 오고 있어서 1992년에 입었던 힙합바지를 제작하고 있고 저도 다시 입을 예정입니다.
- 저는 시나리오를 먼저 쓰기 시작합니다. 시나리오 안에서 가사에 꼭 들어갔으면 하는 문장을 적어가며 체크를 합니다. 그 내용을 토대로 경험을 했던 부분인지 안 한 부분인지 구분을 하고 경험하지 못했던 부분을 직접 체험하러 갑니다.
노래, 연주, 작곡하는 과정에서 경험을 하고 진행하는 것과 경험 없이 하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특히 노래를 부르는 부분에 있어서는 수준 차이가 심하게 납니다.
‘소리쳐봐’를 예를 들면 ‘혼자보다 둘이, 둘보다 셋이, 셋보다 넷이 힘을 합치면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고 나는 세상을 향해 크게 소리칠 수 있다’라는 내용이에요. 저는 어릴 때부터 솔로로 활동하긴 했지만 주변 스태프들이 항상 함께 했었고 저 혼자 독립적으로 무얼 해본 경험이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철저하게 혼자 있어봐야 하는 경험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차도 없이 돈도 없이 6개월 동안을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그 경험으로 인해 사람들 도움을 받으면 이러한 감정이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시나리오로 녹여냈습니다.
‘무념무상’이라는 노래는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이 일부 몰상식한 권력층에게 울부짖고 항의하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무작정 서울역에 가서 11월에서 12월까지 한 달 동안 노숙자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이 언제 기뻐하고, 슬퍼하고, 무엇이 필요하고 세상에 어떠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계속 인터뷰를 했었어요. 그렇게 완성된 곡이 무념무상이에요. 이렇게 경험을 하고 나서 편곡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 감성을 반영하여 편곡을 해야 느낌을 가지고 표현할 수 있거든요.
편곡한 반주 위에서 가이드를 하면서 멜로디를 붙이고 제가 경험한 것들 중 핵심적인 문장들을 추려냅니다. 그리고 편곡한 곡, 가이드 멜로디, 시나리오(가사에 녹여냈으면 하는 문장들)를 홍지유 작사가님께 보냅니다.
중요한 점은 시나리오에 적은 문장들이 앞뒤로 내용이 연결될 수 있게 만들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가이드의 발음을 살려서 단어를 찾아서 넣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렇게 까다로운 작업과정이 있기에 한국에서 제 곡을 작사해 주는 작사가는 홍지유씨 밖에 없습니다. 작업과정이 너무 고난도이고 작사만 한 달 이상 걸리기에 다른 작사가 분들은 중도에 포기를 하시더라고요.
가사가 완성되면 가이드 녹음을 먼저 하고 이후 계속 연습을 하여 녹음실에 가서 최종 녹음을 합니다.
곡 작업과정이 다른 작곡가들과 완전히 다른 것 같습니다.
- 제 노래만 이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이 노래의 스토리를 경험한 사람이어야지만 진심으로 감성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곡들은 상상해서 작업하기도 합니다. 현진영 프로젝트로 나오는 OST에 제자들이 부르는 곡들이 있는데 제가 경험하지 않은 것들도 상상해서 만들기도 합니다.
제가 직접 부르는 장르는 재즈힙합이기 때문에 자기 인생이 기본적으로 녹아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 자신을 모르면 재즈를 한다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경험한 것을 모르면 그 노래를 부를 수 없어요.
작곡하신 노래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 한 곡만 뽑는다면 ‘소리쳐봐’입니다. 곡을 만드는 과정도 길었고 고생을 많이 했어요. 장장 6개월 동안 돈 한 푼 없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다닌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경기도, 춘천, 대전 등 타지들 돌아다니며 교회에서도 자고, 친구 집에서도 자고 고생하며 지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도움받는 경험을 제대로 하게 되었어요. 사실 ‘소리쳐봐’가 나오기 전에는 음악 작업과정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을 일부러 찾아다니지는 않았지만 ‘소리쳐봐’를 작곡할 때부터 스스로 능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게 되었어요.
작곡하신 곡 중 ‘요람’을 만드신 과정이 궁금합니다.
- 구치소 안에서 만들었어요. 구치소에서 겨울밤에 마룻바닥에서 찬 냉기가 올라오는데 코가 시리고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추운 공간에서 ‘이 현실이 엄마 품에서, 아빠 보호 아래서 잠이 들던 요람이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만든 곡이에요.
대한민국 1세대 재즈 피아니스트셨던 아버님께서는 어떠한 음악적인 영향을 주셨나요?
- 아버지는 우리나라 최초 미 8군 재즈 빅밴드 ‘트리플A’를 만드신 분이예요.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음악이론을 가르쳐 주지 않으셨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카세트테이프가 여러 개 들어가 있는 박스를 발견했는데 박스 앞에 ‘현석이 스케일 학습 테이프’라고 적혀있어서 열어보니 코드 C에서 B까지 테이프마다 전부 적혀 있었던 거예요.
생각해 보니 어렸을 때 피아노 학원에 다녀오면 아버지께서 E 코를 찍어주고 마음대로 연주해 보라고 하셨을 때 제가 연주한 부분에 대해 만족하시면 그날은 밖에 나가서 놀고 오라고 용돈도 쥐어주셨어요. 그런데 제가 연주한 부분이 만족스럽지 못하시면 밖에도 못 나가고 하루 종일 재즈음악을 틀어놓으셨는데 어릴 때는 ‘본인이 듣기 위해 틀어놓으시는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저에게 스케일을 듣게끔 해서 학습을 시키셨던 거예요. 제가 D로 시작하는 연주를 못하면 D로 시작하는 음악을 하루 종일 듣게 하셨었어요. 귀로 듣고 제가 익히게 하셨던 거예요. 스케일 공부는 듣는 방법밖에 없거든요. 아버지는 일상생활 안에서 저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같아요.
하루는 군인들 위문공연 가기 전날에 본인은 군인들이 언제 슬퍼하고 눈물 흘리는지 모르니 체험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셔서 집 앞에 눈 쌓인 마당에서 이불을 펴고 주무신 일화가 있었어요. 그때는 ‘아버지는 정말 음악에 미친 사람이다’라고 생각을 했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제가 뮤지션의 길을 걷고 아버지가 하셨던 행동을 하게 되니 왜 그렇게 행동하셨는지 이제는 이해가 됩니다.
앞으로 도전해 보고 싶은 장르가 있다면?
- 사실 그동안 많은 장르들을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국악인 이희문씨와 함께 국악과 재즈를 콜라보레이션 해보는 것이 희망입니다.
탄탄한 보컬 실력을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 특별한 목 관리는 하지 않고 있지만 호흡과 발성을 매일 10분 이상씩 하고 있습니다. 호흡, 발성이 안 잡힌 상황에서 계속 노래를 하게 되면 오히려 목이 망가집니다. 호흡, 발성은 톱니바퀴처럼 붙어있어서 한 가지라도 멈추면 안 됩니다. 저는 1988년도 SM 연습생 시절 이수만 선생님의 커리큘럼에 성악을 기본으로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호흡, 발성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도 매일 호흡, 발성을 했었어요. 길게는 한 시간 짧게는 10분씩 지금까지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어요. 이것이 저만의 보컬을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바람기억’ 라이브 무대를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 저는 기본적으로 가수라면 이 정도 수준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에는 기본이 안된 가수가 너무 많다 보니 제가 상대적으로 더 잘해 보이는 것뿐이에요. 90년대에 저희 선배님들을 생각해 보면 저보다 훨씬 노래를 잘하는 분들이 많았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노래를 못하는 가수들이 많이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제가 더 잘해 보이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데뷔하기 전 SM 연습생 시절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세요.
- 재밌는 일화가 많이 있었습니다. 데뷔 초에 이수만 선생님이 구해오신 일본 유명 디자이너가 만든‘야한 여자’의 무대의상을 세탁하기 위해 집에 가지고 가다가 지하철에서 졸다가 놓고 내린 일이 있었어요. 당시에 100만원이 넘는 옷이었는데 결국 똑같이 카피해서 만들어서 입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리고 안무가 유출되면 안 되는 상황이라 지하 연습실에 갇혀서 연습했던 기억도 있고요. 데뷔 전에 문나이트 라는 춤추는 클럽에서 흑인들과 놀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Feel을 배웠던 기억이 있어요. 당시에는 많이 신나고 즐거웠었어요.
요즘 아이돌 제작자들의 포인트는 군무, 칼각이 기본이지만 당시 이수만 선생님의 가르침은 그루브와 Feel을 중요시 생각하셨었어요. 이런 기본기들이 나중에 저의 안무에 영향을 많이 주었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음악 활동을 멈추지 않고 지속하는 비결을 말씀해 주세요.
- 제가 할 수 있는 게 음악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이것보다 제가 더 돈을 잘 벌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실은 작곡가로써 한 곡을 써도 일반 직장인보다 많이 벌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아요. 가수를 계속할 수 있었던 계기는 제가 작곡가였기 때문에 직접 곡을 쓰고 제 작업실에서 녹음하면 되니까 가능했습니다. 저는 음악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절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음악 이외에는 할 것이 없다고 자기를 세뇌해야 했었어요. 그리고 음악으로 나도 즐겁고 가족들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지 생각을 했을 때 자신이 있다면 끈을 놓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뮤지션으로서 슬럼프가 있으셨나요? 극복하신 비결을 말씀해 주세요.
- 저는 데뷔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슬럼프예요.
계속되는 슬럼프 안에서 한 가지 목표를 이루었을 때 잠깐 슬럼프를 벗어나는 것 같아요. 끊임없이 노력하는 기간은 그 뮤지션에게 슬럼프나 마찬가지인 거죠. 계속된 시행착오를 겪으며 안됐던 부분을 성공하면서 무대 위에서 박수를 받을 때 잠시 벗어났다가 내려오면 다시 슬럼프라 시작되는 것 같아요. 음악은 만족하는 순간 끝난다고 생각해요. 내 노래, 내 작품, 내 플레이에 만족하는 순간 죽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 대한 채찍질이나 무대 위 연주를 후회하는 분들이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인기를 많이 얻으면 교만하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대중들 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분들이 많죠. 저도 그 중 하나였고요.
제가 잘 되었을 때 교만했기 때문에 모든 걸 잃어버리고 바닥을 치고 다시 회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었죠. 그런데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소리쳐봐’도 안 나왔을 거고 재즈 힙합도 하지 않았겠죠.
휴식이 필요할 때는 어떻게 힐링하시나요?
- 저는 주로 콘솔게임(플레이스테이션)을 하고 반려견들과 산책을 합니다. 쉬는 날은 아내와 함께 애견카페에 자주 갑니다.
음악에 대한 확신이 있으셨나요?
- 저는 음악으로 잘 될 자신이 있었어요. 포기하지 않는다면 음악을 계속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궁극적인 목표는 재즈였고 재즈는 대중적인 인기와는 관계없으니까요. 꾸준히 노력했더니 재즈 페스티벌에 초청될 정도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실패와 포기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길을 끝까지 가봐야 결과를 알 수 있는데, 중도에 포기해 버린다면 결과를 확인할 수 없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사람만이 성공을 확인할 수 있는 거예요. 저는 결말을 봤다는 것 자체가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포기를 너무 쉽게 하는 모습을 볼 때 안타까워요. 제자들에게 ‘포기하지 않고 결말을 보는 게 인생에 대한 성공이다.’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어요.
뮤지션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팬이 있다면?
- 예전에 백혈병을 앓고 있던 여성 팬이 있었는데 우리 딸이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다가도 TV에 현진영 씨가 나오면 웃는다고 병원에 와서 사인을 해줄 수 있는지 아버지께서 직접 편지를 써주셔서 방문하기로 했었어요. 그런데 스케줄이 계속 나지 않아서 미루고 미루게 되었는데.. 결국 그 팬이 하늘나라로 떠난 일이 있었어요.. 그 때 못 간 부분에 대해 후회를 많이 하고 있어요. 지금도 가슴에 짐처럼 남아있어서 생각이 계속 납니다.
가수를 꿈꾸는 분들에게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위 인터뷰 내용에서 저의 조언이 도움이 된다면 주저하지 말고 직진하세요. 그러나 음악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떠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요. 음악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어렵고 고된 길이니까요.